찬바람이 불면 은행나뭇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 나에겐 쓸쓸하지만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은행나뭇잎 하나하나가 소임을 다하고 가을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존경과 감사를 느낀다. 노란 단풍잎이 되어 낙하하는 날 난 어떤 은행나뭇잎 하나를 주워 책갈피에 곱게 끼울 것이다.
멍이 든 돌배는 경이롭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에 찍혀 멍이 들었어도 나무에 달려 있음은 생의 의지다. 벌레와 새가 먹어버린 다른 돌배들을 뒤로 하고 살아남은 건 커다란 운이다. 지금 내 눈에 띈 것은 기막힌 우연이다.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아기 주먹한 한 돌배는 그리하여 아름다운 기적이다.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날짜 지난 신문을 들추듯 기억을 더듬어 어디로 일을 다니는지 누구와 연애를 하는지 물었다. “추석 전 주말에 한 번 보자.” “좋지. 친구들 있는 단톡방에 글 남겨.”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20년 전이나 오늘이나 같았다. 마음속 추억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처럼.
가을 볕 눈부신 날에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공사장 앞을 지나면서 안전모를 쓰고 걸어오는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생각한다. 나도 이번 가을에 꿈 하나를 지어 올려야겠다. 먼저 땅을 파고 터를 다질 것이다. 사랑, 우정, 고독이라는 이름의 안전모를 마음에 쓰고서.
지나고 보면 소중한 것들이 있다. 그때의 마음가짐, 생각, 의지, 호감, 날씨, 무드 같은 것들은 책상 위의 그때 보았던 책과 언어가 되살린 기억 속에서 살아 있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와 있는가. 이제부터는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도 소중한 것들을 지난다.
의미로 가득 찬 세상에서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무의미다. 의미만을 찾아 헤매다가 모든 것이 끝날 지도 모른다. AABA에서 B가 의미 있는 것처럼 의미를 반복하면 무의미 한 번이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미 있는 무엇을 해야겠다가 아니라 무의미한 무엇을 한 번 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